세 남자의 목소리
듣는 영화 <극동>의 유재명, 김강우, 곽동연. 이들이 그려낸 빛과 그림자.
세 분 모두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곽동연 오디오 무비 <극동> 공개 이후 팬들의 반응이 어떤지 찾아보고 있어요. 드라마 <가우스 전자>는 막바지 촬영 중이고요.
김강우 종종 홍보 일정이 있지만, 할 만해요. 처음 찍는 오디오 무비인데다 시각적으로 확 드러 나는 영화가 아니라서 어떻게 많은 분에게 알릴지 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유재명 저는 요즘 <도적: 칼의 소리>라는 작품을 촬영 중입니다. 작품 특성상 지방 신이 많아 이곳저곳 바쁘게 이동하며 촬영하고 있어요.
오늘 화보 촬영은 어땠나요?
유재명 화보 촬영을 많이 해보진 않았어요. 나이 들어 찍으려니 더 어색하고 쑥스럽네요. 오늘은 스태프들이 잘해주셔서 순조로웠던 것 같아요.
곽동연 저는 화보 촬영을 좋아해요. 작품에서 시도하기 어려운 콘셉트를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거든요. 패션에도 관심이 많고요. 그런데 일상에서는 늘 편한 옷만 입고, 신경을 잘 못 써요.(웃음)
오디오 무비라는 장르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김강우 시나리오가 재미있었어요. 낯선 장르라 궁금하기도 했고, 감독님이나 참여하는 배우들도 함께 작업해보고 싶던 분들이라 결정하기가 쉬웠죠. 진부한 말 같지만, 사실 이런 이유가 좋은 선택을 하는 데 큰 계기가 돼요. 걸리는 게 없었어요. 실제로 호흡도 좋았고요. 오디오 무비와 시각 영화 두 장르의 우열을 가릴 순 없지만, 이들과 화면 안에서도 같이 움직이고 호흡해봤으면 하는 욕심이 생길 정도였어요.
곽동연 곽경택 감독님이 오디오 무비를 제작한다는 말을 듣고 관심이 생겼어요. “오디오 무비가 뭐예요?”가 시작이었는데,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꼭 하고 싶었어요. 감독님과 제작진이 원한 건 목소리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실제 영화를 틀어놓고 소리만 듣는 것처럼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드는 거였어요. 시각적 효과가 없기에 듣는 이가 각각 다른 작품을 즐기듯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유재명 사실 배우에게도 생소한 장르예요. 촬영하고 후녹음을 하거나 다큐멘터리에서 내레이션 녹음하는 건 다르 니까요. 감독님이 제안하셨을 땐 편한 마음으로 임했어요. 흔히 아는 라디오 드라마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오디오로 만 영화를 만든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죠. 알지 못하던 세계라 당황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재미를 느끼기도 했어요
오롯이 목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새로웠어요.
오디오 무비 장르가 더욱 활성화되어 많은 배우가
참여하면 좋을 듯해요.
_유재명
제작 과정이 생각보다 어려웠고, 녹음을 하는 데도 영화에 버금갈 만큼 정성과 시간을 쏟았다고요.
김강우 모든 부분에서 조금 더 예민해야 했어요. 시각적으로 표현을 못하니, 액션도 그렇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죠. 영화를 찍을 때 보다 감정을 더 풍부하게 했습니다. 녹음실 안에서만 연기를 하다 보니 움직임이나 호흡에도 더 신경 써야 했고요. 액션 신이 많아 실제로 액션 연기를 하듯 호흡을 가져가야 했는데, 그런 부분에서 감독님도 많은 준비와 고민을 하셨더군요. 붐 마이크를 비롯해 총이나 가방 같은 소품도 직접 가져오셨어요. 덕분에 더 몰입할 수 있었죠. 사실 녹음할 때마다 감독님도 녹초가 되 어 집으로 가셨어요.(웃음)
곽동연 처음에는 얼굴이나 몸짓처럼 외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더 편하겠지 했어요. 그런데 나중엔 오히려 그런 것의 도움을 못 받는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죠. 음성만으로 상황을 전달하고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만큼 더 집중하고 세세하게 설정해 연기를 하려고 했죠. 예를 들어 탁자를 만들려면 나무와 못, 망치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나무만 갖고 갑자기 탁자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인거예요. 잘 마칠 수 있었던 건 감독님 덕분이에요. 디렉션이 명확했고, 시나리오를 직접 집필하시다 보니 영화의 흐름이 잘 정립된 상태였죠.
처음엔 마이크가 고정돼 있어 대사를 하다 고개를 돌리면 소리의 지향성이 달라졌어요. 마이크는 그대로 두고 고개를 돌리는 듯한 느낌으로 연기했는데, 몸이 묶여 있으니 연기하기 쉽지 않더군요. 그때부터 감독님이 고정된 마이크를 떼어 배우들 옆에서 함께 움직여주셨어요. 존경스러운 한편으로 감독님도 오디오 무비가 처음일 텐데 어떻게 전문적으로 작업하셨는지 지금도 의문이에요.
유재명 영화는 대부분 야외에서 촬영하다 보니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오디오 무비 또한 단시간에 엄청난 양의 연기를 해야 해요. 집중도나 피로감은 영화 촬영 때와 다르지 않죠. 또 연기에서 인물의 눈빛, 태도, 뉘앙스, 얼굴의 각도처럼 종합적인게 모두 감정을 표현하는 요소인데 그런 걸 목소리만으로 나타내는 건 좀 힘든 일이었어요.
그래서 신뢰감을 주기 위해 공을 들였죠. 신을 따라가면서 인물을 보지 않아도 눈빛을 상상하게 만드는. 이 오디오를 들으면서 영상을 보는 것처럼 만드는 게 중요한데, 욕심을 부릴수록 힘든 작업이었어요.
<극동> 은 욕심을 낸 작업이었고요.
기하학적인 패턴 포인트 터틀넥 니트,
앵클부츠 모두 Prada.
블랙 터틀넥 스웨터 에디터 소장품.
지금까지 당연시하던 것들이 사실 당연한 게 아니었고, 관객들이
_김강우
우리 영화를 사랑해주는 게 엄청난 행운이었다는 걸 깨달았죠.
저를 포함해 모두가 노력해야 관객들의 사랑이 더 오래가지 않을까요.
자신이 맡은 캐릭터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유재명 <극동>은 천문학적 금액의 북한 정권 비자금을 관리하는 이수영이란 인물이 러시아 주재 한국 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하면서 일어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 영화예요. 액션과 첩보물로, 여러 인물이 역동적으로 나오면서 그 돈을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제가 맡은 이수영 역은 북한 정권 비자금 관리자고, 아주 어릴 때부터 외국 유학을 가서 자본에 대한 공부를 한 캐릭터죠. 뛰어난 두뇌와 재능을 이용해 엄청난 돈을 모은 뒤 북한에 가져가 관리합니다. 그런데 북한 정권의 실상을 마주하고 동포들을 향한 안타까움을 가슴속에 지닌 채 망명을 신청하는, 한마디로 악한 사람인지 선한 사람인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입니다. 이 역할의 매력은 두뇌가 뛰어나다는 것, 그 재능으로 생존하기 위해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가능성을 계산한다는 거죠.
곽동연 강영식이란 인물은 북한의 어떤 특수부대 부대장인데, 험한 환경에서 살아온 만큼 날카롭고 포악한 모습도 지닌 캐릭터예요. 자신이 되찾아야 하는 비자금을 계속 쫓으며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슴없이 처리하기도 합니다. 경제적 중책을 맡고 있지만, 원래는 북한의 최고 통수권자를 호위한 엘리트 군인이거든요.
김강우 제가 맡은 인물은 러시아 주재 영사인 안태준이에요. 어느날 이수영이란 의문의 북한 측 인사에게 솔깃한 제안을 받고 사건에 휘말리는 인물이죠. 주요 등장인물은 저 빼고 모두 북한 출신입니다. 국정원 소속으로 다소 특별한 직업일 수 있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한의 가장이고 평범한 40대거든요. 그런 점에서 다른 배역과 차별성이 있어요. 작품 장르가 첩보, 스릴러, 액션이란 표피를 지녔기에 어쩌면 무거워지거나 인물이 묻힐 수도 있는데, 저는 그걸 염두에 뒀어요. 이를테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40대 가장의 고민 같은 걸 마음에 두고 옆집 아저씨처럼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표현했어요.
영화를 볼 때 감상 포인트가 있는 것처럼 <극동>도 리스닝 포인트가 있나요?
곽동연 음악 중 ‘쫄깃쫄깃한 맛’이 있는 곡이 있어요.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 쫀쫀한 맛이 저희 작품에 충만해요. 배우들의 대사도 잡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들리고 발소리, 총 소리, 문 닫는 소리마저 정확하게 담아냈죠. 앞서 말했듯이 청취자들은 자신이 상상하는 장소, 생각하는 장면이 제각각 다를 거예요.
유재명 저도 비슷해요. 개인적 생각인데, 우리가 영상을 볼 때는 정보량이 많잖아요. 그런데 오디오 무비라는 장르는 자기만의 연출을 해보는 묘미가 있어요. 만약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거나 닫히고 어떤 효과음이 들릴 때 사람마 다 같은 부분을 풀숏으로 잡을 수도 있고, 클로즈업으로 볼 수도 있죠. 내가 이 작품의 연출가라고 생각하며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보세요.
김강우 영화는 워낙 쉽게 접하는 매체라 익숙할 텐데, 오디오 무비는 귀로 느낄 수 있는 극한의 즐거움인 것 같아 요. 최초 돌비 애트모스를 적용한 오디오 무비이기도 하니까요.(웃음)
팬츠 모두 Zegna.
세 분 모두 목소리가 좋아 작품을 듣는 내내 오디오 무비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유재명 저도 연극을 포함해 오랜 시간 연기를 했는데, ‘내 목소리에 이런 느낌이 있었나’ 싶더군요. 목소리만 집중해 들은 건 처음이에요. 결과물을 들어보니 배우 간 조화가 괜찮더군요. 오롯이 목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새로웠어요. 오디오 무비 장르가 더욱 활성화되어 많은 배우가 참여하면 좋을 듯 해요.
곽동연 저는 선배님들의 녹음본을 미리 들어보지 못해 궁금했어요. 듣고 나서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김강우 선배님이 영사관에 들어온 탈북민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지도, 편달하는 신이에요. 정말 실감 났고 ‘저걸 현장에서 연기하는 것 이상으로구현할 수 있구나’ 감탄했어요. 재명 선배님은 제가 말장난처럼 신성한 음성이라고 해요. 강영식은 남성성이 짙은 인물이라 최근 <청춘MT>에서 보여드린 장난기 많은 캐릭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어요. 누군지 모르게 속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모르고 들었는데, 나중에 곽동연인 걸 알게 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웃음)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서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부쩍 늘었어요. 앞으로 영화계 또는 활동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유재명 지금 생각해보면 팬데믹 시기임에도 몇몇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해외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어요. 우리나라 감독, 배우들의 실력이 뛰어난 만큼 어려운 시기를 조금만 견딘다면 훌륭한 작품이 더 많이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적 부분에서도 어떤 터널만 통과하면 잘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어요. 저 역시 잘 버티면서 작품을 해나가려 해요. 가까운 미래에 많은 사람이 모여 영화를 즐기는 축제도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강우 저는 영화인이고 배우지만, 한편으로는 관객이기도 해요. 처음 코로나19가 시작될 때는 겁이 나기도 했어요. ‘이대로 끝나는 건 아닐까’ 싶었죠. 긴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끝나가는 듯하고, 그 시간을 통해 영화와 삶에 더 애정이 생겼어요. 지금까지 당연시하던 것들이 사실 당연한 게 아니었고, 관객들이 우리 영화를 사랑해주는 게 엄청난 행운이었다는걸 깨달았죠. 저를 포함해 모두가 노력해야 관객들의 사랑이 더 오래가지 않을까요.
곽동연 영화계는 요즘 회복세라는 걸 느낍니다. 잘된 영화도 있고, 최근엔 사람들이 극장을 잊지 않 았다는 걸 체감하고 있어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공연 예술계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주로 매체 연기를 하는 배우지만, 연극이나 뮤지컬에도 큰 애정을 갖고 있거든요. 공연 예술이 영화, 드라마보다 시선을 덜 받다 보니 팬데믹 시기에도 많은 사람이 실직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상황이 나아지면서 이전보다 많은 관심을 받고 상생하면 좋겠습니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연말에 계획 중인 일이 있을까요?
김강우 큰 계획은 없습니다. 올해를 잘 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하 려 해요. 팬데믹 이후 한 해 한 해 의미가 크다는 걸 느낍니다. 일상을 회복한 해인만큼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올해는 가족과 함께 감사한 마음으로 연말을 보내려고요.
곽동연 올 연말에도 일할 것 같지만, 저를 좋아해주는 팬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과 다양하게 소통하며 풍성한 연말을 맞고 싶습니다. 지금 막바지 촬영을 하고 있는데, 드라마가 끝나면 원래 체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려고요. 일하면서 살이 많이 빠졌거든요. 언젠가 여건이 되면 임계점에 도달할 때까지 몸을 키워보고 싶어요.
유재명 지금 참여중인 드라마를 열심히 찍을 생각이고, 무사히 잘 마친 후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그렇게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는 게 가장 큰 희망이자 소박한 미래 계획입니다. 오랜만에 고향인 부산에도 가보고 싶네요.